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2] -피아의 대치 상황-

 

 

 

 

 

 

 

 

  쓰러지지 않는 오뚜기 [2]   

 

-피아의 대치 상황-

 

 

북한군 5사단은 양양에서 백두대간을 넘어 인제까지 동서로 길게 배치되어있었는데

중간에 있는 백두대간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의외의 배치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중동부전선의 북한군 2군단은 제2, 5, 12사단으로 구성되었고

이 중 5사단은 2제대 역할을 부여 받아 주 침공통로가

인제-홍천가도를 통하여 돌파구를 확대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북한군 제5사단은 실전 경험까지 많았던 최정예 사단이었다

 

2000년대 중반 이전에 발간된 각종 공식 전쟁사를 보면 동부전선 백두대간 서쪽에 배치된

북한군은 제2, 7, 15사단 그리고 동쪽에는 5사단이 별개로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이후 공개된 구 소련 측 자료 등을 통하여 새롭게 확인된 사실에 따르면 15사단은

서부전선에 배치된 제1군단 소속의 예비부대로 개전 초에는 활약하지도 않았다.

 

반면 오랫동안 동해안만 담당하던 것으로 알려졌던 5사단이 백두대간 양쪽에 걸쳐 배치되었던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다. 주력 대부분은 백두대간 서쪽인 인제에 집중되어 있었고,

동쪽 양양에는 사단 전력의 약 30퍼센트 수준인 예하 제10연대와 일부 포병부대가

38경비 1여단의 바로 뒤에서 제2제대 역할을 맞게끔 후속 배치된 상태였다.

 

 

창설 당시 북한군의 모습

 

 

이 때문에 개전 초에 38선 돌파 주체는 38경비 1여단이었고 이들은 동해축선을 따라 급속

남진하여 적어도 729일까지는 포항을 점령하기로 예정되었다.

 

여기서 그들은 백두대간 서쪽에서 밀고 내려 올 북한군 2군단과 전선을 연결하여

815일까지 부산을 점령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거기에 더불어 북한군은 기발한

별도의 작전을 동해안에서 병행하였다.

 

우리군의 배후를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전쟁발발 직전에 동해안의 임원진과 정동진으로

기습 상륙하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독립 제766부대와 제945육전대(이부대의 정체

역시 오래 동안 제549육전대로 알려져 있었다)를 편성하여 놓은 상태였다.

이들은 상륙 후 기존의 암약하던 공비세력과 연계한 후 우리군의 퇴로를 막을 생각이었다.

 

 

북한은 38경비 1여단, 5사단 외 상륙부대인 766부대, 945육전대를 전개 시켜 놓고 있었다.

 

 

반면 지형적인 여건으로 여타지역과 달리 북한군은 동해축선에 기계화 부대를 배치하지 않았다.

이것이 모든 이유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고속기동부대가 투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동해축선이

38선에서 부산에 이르는 가장 짧은 축선임에도 불구하고 북한군의 전진 속도는 상당히 느렸다.

 

따라서 종합적으로 고려 할 때 태백산맥의 서쪽에 배치된 여타 북한군에 비해 동해축선의

북한군은 그리 강력한 편제였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지

이를 상대하여야할 우리군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상당히 우세한 전력이었다.

 

해당지역을 방어하던 우리군은 1949620일 강릉에서 창설된 국군 제8사단이었다.

 

 

고속 기동부대는 없었지만 우리군보다 전력이 우세하였다.

 

 

오뚜기부대는 전쟁직전에 38선 이남 진흑동에서 잔교리에 이르는 26킬로미터의 전선을

담당하였지만 삼각편제가 아닌 2개 연대와 약간의 직할부대로 이루어진 감편된 형태였다.

전쟁 직전 국군이 보유하였던 사단의 절반인 제2, 3, 5, 8사단은 두개 연대로 이루어진

감편 사단들이었는데, 그중 오뚜기부대가 유일하게 전방에 배치된 사단이었다.

 

하지만 당시 전방 완편 사단들이라 하더라도 제1사단이나 제6사단이 무려 90여 킬로미터가

넘는 38선의 넓은정면을 담당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한다면 비록 오뚜기부대2개 연대로

이루어져 있었어도 평균적인 수준의 임무가 부여된 정도였다.

 

오히려 당시에 주력부대인지 아닌지는 전방부대에게만 배치된 포병대대의 보유여부로

판가름하여야 했다.

 

 

국군 제8사단 창설 기념비

 

 

8사단의 예하 제10연대는 사단본부와 함께 강릉인근에 주둔하면서 38선 경비와 함께

오대산 일대의 공비소탕작전을 수행하였고, 21연대는 남쪽인 삼척에 주둔하며

주로 두타산 일대의 공비토벌 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15문의 M-3견인곡사포를 보유한 제18포병대대가 19491028

사단에 배속되어 화력 지원을 위해 강릉에 주둔하고 있었다.

 

반면 이 일대에 포진한 북한군의 총 병력은 17,000여 명으로 아군 6,866명의

2.5배 가까이 되었고 포병전력도 122밀리미터 곡사포 4문을 포함한 총32문의

다양한 곡사포를 보유하였다.

 

때문에 전쟁직전 북한의 전력은 표면상 우리군의 2배 이상이었지만 화력까지

계량화 한다면 4배가 넘는 전력이었다.

 

 

동해안 지역의 적은 우리군의 4배가 넘는 전력이었다

 

 

더구나 우리군은 부대창설과 더불어 38선 경비와 공비 소탕전을 전개하였던 이유로

체계적인 연대 급 전술훈련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반면 툭하면 벌어지는 실전 상황 때문에 소부대 전투 경험은 풍부하였는데,

오히려 이런 경험으로 말미암아 적을 과소평가하는 분위기가 팽배하였고 설령 적의

전면남침이 있다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계속)

 

 

 


Trackbacks 48 / Comments 0

댓글 남기기

블로그 인기 키워드

Tistory Cumulus Flash tag cloud by requires Flash Player 9 or better.

링크

re_footerlink.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