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에 있던 포로수용소 [下] 간악한 시도

 

 

 

 

 

 

전술한 바와 같이 국내에 있던 가장 큰 연합군 포로수용소 시설이 인천항 바로 앞에 있었다. 그런데 근처에서 가장 높은 곳은 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인천여상)인데 수용소에서 직선으로 400여 미터 떨어진 곳이다. 여담으로 인천여상은 1945년 해방직후 개교한 학교인데 학생들의 자질이 우수하여 한때 졸업생들이 좋은 직장에 입도선매될 정도로 취업률이 좋았던 명문 상업학교다.

 

인천여상은 인천항 앞 언덕 위에 위치하고 있다.

 

인천여상 일대는 1977년 행정구역이 변경되며 신포동으로 편입되었는데, 해방이후에는 신생동(新生洞)이라 불리던 곳으로 인천 토박이들은 지금도 신생동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해방이후 새롭게 태어난 마을'이라는 의미다. 그렇다면 해방 이전에는 어떤 마을이었기에 새롭게 태어났다는 의미에서 신생동이라 이름 지어지게 되었을까? 바로 여기에 인천에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위치하게 된 해답이 있다.

 

인천포로수용소 내부의 모습

 

원래 인천은 인천도호부가 위치하던 현재의 문학야구장 인근이었지만 19세기 말 개항이후에는 제물포포구 일대를 의미하게 되었다. 포구에서 가까운 신생동 부근은 개항 전에 '인천부 다소면 선창리'라고 부르던 곳이었는데 개항 후 밀려들어온 일본인들이 1887년부터 공동묘지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1910년 전후에 일본 거류민 집단촌이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인천여상 위치에 동공원(東公園)이라 불리는 근린공원을 만들었다.

 

1910년 경 신생동 일대 지도 우측 하단이 동공원 자리다. (외곽의 빗금 친 부분이 조선인 거주지다.)

 

당시 인천 도심에는 동서외곽 봉우리에 각각 공원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이라는 만국공원(현 자유공원), 즉 서공원(西公園)과 지금 설명한 동공원이다. 그런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한 후 만든 근대식 공원들에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다. 바로 가장 좋은 위치에 신사(神社)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고 이점은 동공원도 같다. , 신생동은 일제의 신사가 위치한 곳이었다.

 

인천여상 자리에 위치하던 신사

 

1912년 일제가 지명을 일본식으로 개칭할 때 이곳은 신사가 있다하여 미야마치(宮町)라고 고쳤다. 이처럼 지명만으로도 일제의 간악함을 알 수 있다. 당연히 해방과 더불어 신사는 폐쇄되었고 1946년 일본식 명칭을 변경하는 계획에 따라 행정 구역이름도 신생동으로 개칭되었다. , 신생동은 일제의 신사가 있었던 뼈아픈 치욕을 없애려는 신생 독립국의 염원을 담은 새로운 이름이었던 것이다.

 

1949년 미 군정 당국 철수 당시 인천항에서 촬영된 인천여상 (뒤편 언덕)

 

여자고등학교라 직접 방문한 적이 없어 직접 확인하지 못하였지만 지금도 인천여상 구내에는 신사로 사용할 당시에 있던 석축과 돌기둥이 일부 남아있다. 그런데 왜 일제는 그렇게 귀하게 여기던 신사 바로 옆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을까? 답은 바로 함께 있다. 목숨을 걸고 신성시 하던 신사를 보호하기 위한 방패막으로 삼고자 포로수용소를 설치한 것이다.

 

인천항과 신사(원 표시)를 폭격으로부터 보호할 위치에 포로수용소를 만들었다. (1945년 촬영된 인천항 내항의 모습)

 

미군 정보 당국이 194412월 항공 촬영한 당시의 사진을 보면 연합군 측도 포로수용소의 위치를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적어도 아군 포로들의 피해를 우려하여 연합군이 수용소 일대에 대한 폭격은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제는 연합군 포로들을 이용하여 신사와 전략 기간 시설인 인천항을 동시에 보호하려 하였던 것이다. 사실 그것은 여타 포로수용소들도 마찬가지였다.

 

1944년 촬영된 인천항 부근과 포로수용소 (그런데 위치가 잘못 표기되어 있다.)

 

식민지 수탈의 이데올로기로 이용하고자 일제는 19456월 현재 한반도 전체에 신궁(神宮) 2, 신사 77, 면 단위에 작은 규모의 신사 1,062곳을 세웠다. 특히 일본거류민 정착지 인근에 만든 인천의 신사는 어떻게든 보호하여야 할 만큼 일제의 중요 시설물이었고 이를 위해 포로수용소까지 유치하였다. 한마디로 지배를 영구히 하려 애쓰던 발악의 현장이었다.

 

남산에 있던 신궁의 모습

 

우연히 우리나라에, 그것도 사는 곳 가까이에 제2차 대전 당시 연합군 포로수용소가 있었다는 역사에서 흥미를 가지고 내용을 알아보았지만 그 배경에 이만큼 간악한 일제의 음모가 숨어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진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비록 지금은 이름도 바뀌었고 그 흔적도 많이 사라졌지만 일제의 신사와 포로수용소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살아있는 반면교사라 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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