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 그 아쉬웠던 역사 -2- "경쟁을 유도한 맥아더"


 

 

 


 

당시까지의 전세를 볼 때 낙동강교두보를 지켰던 미 8군이 기존 전선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서부전선을 담당하고, 급격히 넓어져 미 8군과의 연결이 어려운 함경도 지역을 미 10군단이 담당하도록 한 것은 일견 타당한 측면도 있다. 그런데 설령 지형적인 여건으로 말미암아 지상군을 둘로 나누었다 하더라도 협조만 제대로 이뤄지면 별다른 문제는 없는데 가장 큰 문제는 협조보다는 경쟁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지형적인 여건으로 지휘부를 둘로 나눌 수도 있었으나 문제는 협조가 원활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경쟁은 근본적으로 누가 먼저 한만국경에 도달하는가하는 공명심과 상부의 독려에 의해 일부러 조성된 상황이기도 했다. 유엔군 최고지휘부는 앞에 설명한 것처럼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 보아 단순히 공격 부대가 국경에 도달만하면 전쟁은 그것으로 종결 될 것으로 판단하였고, 따라서 각개 부대 간의 진격 경쟁은 전쟁을 조기에 끝내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생각하였던 것이었다.

 

 


한만국경에만 도달하면 그것으로 전쟁이 끝날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실 이런 문제는 유엔군 총 사령관 맥아더가 특별히 함경도 지역을 담당할 부대로 인천상륙작전의 주역인 미 10군단을 전격적으로 선정하면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0군단은 제2차 대전 종결 후 해체되었다가 6.25전쟁이 발발한 후 도쿄에 위치한 미 극동군사령부를 바탕으로 재창설되었는데, 순전히 인천상륙작전을 위하여 탄생한 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천상륙작전에 참여한 미 10군단이 원산으로 상륙할 부대로 낙점되었다.

 

 

그런데 인천으로 상륙하여 서울을 탈환한 이후에 정작 미 10군단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정해진 것이 없었다. 서울을 수복한 이후 미 10군단은 어정쩡하게 제자리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어처구니없지만 그것은 사실이었고 단지 미 8군을 이끌던 워커(Walton H Walker)가 북진이 개시되면 19509월 말 기준으로 가장 북쪽에 있던 미 10군단을 선봉에 내세워 평양으로 진격시킬 생각을 막연히 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서울 탈환 후의 다음 진격에 대해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러나 상륙작전으로 인하여 38선 이남을 예상보다 빨리 회복하는 재미를 맛 본 맥아더는 북진이 개시되자 한반도 북부의 동해안 요충지에 재차 상륙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하고 다시 미 10군단을 상륙부대로 지목하였다. 더구나 미 10군단을 기존의 미8군과 분리하여 독자적으로 작전권을 행사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인천상륙 당시와 달리 참모들 중 절반 정도는 진격로를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고 찬성하였다.


 

 


동해안으로 재차 상륙을 지지한 참모들도 많았다.

 


 


하지만 한국군을 포함한 모든 지상군을 지휘하고 있었던 미 8군 사령관 워커는 미 10군단이 자신의 지휘권을 벗어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당연히 맥아더의 이러한 지휘권 분리에 대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당시 미 10군단은 알몬드(Edward M. Almond)가 지휘하였는데, 그는 버지니아 군사학교를 졸업한 후 장교로 임관하여 1, 2차대전을 모두 섭렵한 경력을 가진 상당히 저돌적인 지휘관이었다.

 

 


원산으로 상륙하는 미 제10군단

 



비록 알몬드는 특별히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지는 않았지만 6.25전쟁 발발 당시에 도쿄에 위치한 미 극동군사령부 참모장으로 근무하다가 미 10군단이 재창설되자 신임 군단장도 겸임하였을 만큼 맥아더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다. 워커 또한 맥아더의 신임을 많이 받던 인물로 알몬드 못지않은 저돌적인 성격이었지만 자기보다 후배고 계급도 낮은 알몬드가 동등한 선상에서 부대를 지휘하게 된 것이 반가울리 없었다.

 

 


미 8군사령관 워커 중장(좌)과 미 10군단장 알몬드 소장


 

더구나 전쟁 전 일본에서 근무할 때부터 이 둘의 관계가 그리 원만하지도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데 정작 알몬드 또한 유엔군 참모장(겸 미 극동군 참모장)만으로도 업무가 과중하다며 미 10군단장의 겸직을 고사하던 처지였는데 인천상륙 후에도 계속하여 미 10군단을 지휘하게 되자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휘관들 모두가 불만이 가득한 상황에서 북진이 진행되었다. (계속)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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