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진, 그 아쉬웠던 역사 -끝- "처참했던 결과"


 

 



 

 



북한이 남침하여 낙동강까지 유엔군을 밀어붙였을 때 한 가지 이점이 있었다. 남쪽으로 전진하면 할수록 전선을 계속 축소 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하여 부대 간의 단절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북한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박탈당하고 19508월 중순을 기점으로 피아간의 전력비는 2:1로 아군이 유리한 상황으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공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조밀한 대치는 피아 모두에게 돌파가 용이하지 않았다.

 

 

반면 북진을 개시한 유엔군은 북진하면 할수록 전선이 넓어졌고 부대 간의 단절은 필연적으로 발생 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주력을 양분하여 북진경쟁을 유도하였다는 것은 횡적연결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종으로만 부대가 앞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였다. 결국 이렇게 만들어진 거대한 간격은 중공군에게 훌륭한 침투로를 제공하여 주었고 멀리 떨어진 유엔군 각 부대들은 배후가 차단되면서 각개격파 될 수밖에 없었다.

 

 



넓게 벌어진 틈으로 중공군이 침투하였고 결국 북진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참전 초기의 중공군은 1951년 봄에 연이어 있었던 대공세 당시처럼 압박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급속한 참전 결정으로 전투력이나 보급능력 등의 총체적 역량이 모자랐고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알려진 것과 달리 압도적으로 병력이 많았던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신나게 북진을 하던 유엔군은 아직까지 부족한 것이 많았던 중공군에게 처참한 패배를 당하였고 북진과 맞먹는 쾌속(?)의 후퇴를 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중공군 참전 초기에 양측 병력은 대등하였다.

 

 

 

중공군이 대단하였기 보다는 잘못된 진격방법을 택하였던 유엔군 최고지휘부의 판단착오 때문에 발생한 측면이 크다. 너무나 아쉽지만 결국 경쟁적인 북진은 실패로 막을 내려야만 했다. 스스로의 보급을 제한할 수밖에 없었고 부대 간의 단절과 경쟁만 유도하였던 북진은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만 갔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것은 없지만 이러한 성급한 북진이 실패 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을 교훈삼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다.




달콤했던 북진은 비극으로 끝나고 눈물의 후퇴가 시작되었다.

 

 

 

흔히 북진통일의 가장 큰 실패원인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손꼽는데, 이런 의견에 반론할 만큼의 또 다른 이유를 찾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쉬웠던 것은 중공군의 참전이 충분히 예견되었던 당시 상황을 유엔군 최고지휘부가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아니 중공군의 참전이 설령 분명해 보였다하더라도 그 효과가 미미할 것이라고 이를 축소하여 애써 무시하려 하였던 것으로 보일 정도다.




아군이 잘못된 북진 방법을 택하였기 때문에 북진은 실패로 막을 내렸다.

 


 

유엔군은 청천강-원산 이북으로 진군 할 때 다른 전략을 구사하여야 했다. 우선 이곳을 넘어 전진하면 전선이 급격히 넓어지기 때문에 청천강-원산에 강력한 교두보를 먼저 설치하여야 할 필요가 있었고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군사전략이었다. 대규모의 반격이 있을 경우 청천강-원산선 만큼 적의 공세를 차단할 수 있을 만한 전략적 자연방어선이 38선 이북의 북한에는 없기 때문이다.


 


천혜의 방어선에 대한 무대책도 참사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다.

 

 

 

결국 청천강 교두보를 구축하지 못한 실기로 인해 역사는 최악의 상태로 그렇게 흘러갔다. 중공군 참전부터 종전까지 유엔군은 화력에서 중공군을 항상 압도하였다. 특히 제공권과 제해권은 유엔군이 거의 무주공산상태에서 운용하였을 정도였다. 따라서 피아 양측의 병력 규모도 그다지 차이도 없었던 중공군 참전 초기에 화력을 앞세워 청천강교두보를 사수하였다면 충분히 적의 공세를 막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1950년 11월 20일 성급하게 발행 된 통일기념우표는 역사의 교훈이다.

 

 

 

하지만 천혜의 방어선인 청천강-원산선의 방어 대책을 수립하지 않았던 아군은 오히려 이곳을 지나 부대 간 간격을 넓혀가면서 북으로 달려갔고 결국 일순간 모든 것을 잃고 뒤로 돌아 올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해 10월 한 달만 기분 좋았던 1950년은 그렇게 지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도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던 역사가 두고두고 아쉬울 뿐이다.



 본 글은 "국방부 N.A.R.A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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