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12-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삼수 경위 세번째 이야기]

산청 사찰 유격대 부하 강성갑 씨의 회고 -12-

 

이 글을 연재하는 동안 보훈처에서 실시하는 2016년도 ’이 달의 6.25 전쟁 영웅’에 경남 산청 경찰서에서 신청했었던 강삼수 경위가 선정되었다. 강삼수 경위는 내년 10월의 전쟁영웅으로 추모될 것이다. 그의 사후 43년 만에 국가가 드디어 이 잊혀진 영웅을 본 것이다. 그의 영웅 선정을 기념하여 몇지 첨언할 사실이 있어 여기에 소개한다.

 

'지리산의 포성' 

​1989년도에 공비와의 격전이 극심했었던 경남 산청의 경찰서는 경찰의 기록과 산청 군내에 아직도 생존하고 있던 참전 용사나 주민들의 증언을 모아 '지리산의 포성'이라는 산청 경찰서 전사를 출판하였다. 경찰서가 스스로 자기의 전사를 출판하는 일은 드문 일이었고 나아가 이 책에 사멸될 뻔했던 전투 경찰의 많은 기록이 보존되어 있다.​

그 때까지 산청군내에 전설처럼 떠돌던 강삼수 경위의 전공이 이 책에서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부족한대로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후에 출판 된 몇몇 전투 경찰사들은 이 책을 인용해서 강삼수 경위를 알리고 있다.

그러나 유족들이 감사해야 할 이 책은 고통 속에 살아왔던 유족들을 더욱 힘들게 했다. 책은 강경위가 ​해방 후 남로당에 합류하여 좌익 활동을 하다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자수하여 속죄의 일념'으로 멸공의 일선에서 싸웠다는 과장된 문체로 그를 잘못 기술했다.​ 

강삼수 경위의 가족들, 특히 6.25 직후 빨갱이들에게 잡혀가 학살 일보 전에 탈출했었던 부인 이종이 여사에게는 고통을 헤치고 살아 온 만년에 튀어 나온 이 엉뚱한 소리는 세상을 뜰 때까지도 한을 품을 정도의 충격을 주었다. 

그녀는 자식들을 시켜 이 책을 전량 회수하는 조처까지도 시도하기도 하였다. 강삼수 경위의 전우 중에서도 산청 경찰서에 전화를 해서 격하게 항의하는 사람도 있었다. 



[현재 산청 경찰서 홈피 사진]



[강삼수 경위 근무 시 산청 경찰서]



강삼수 좌익 출신 누명의 배경​

위의 잘못된 내용에 대한 진실만은 꼭 밝히고자 한다.​ ​버마 전선의 일본군에서 복무하다가 해방1년 뒤에야 돌아 온 강경위는 머리와 허벅지에 입은 깊은 상처 때문에 집에 칩거하고 있었다.


[강삼수 경위가 직접 지은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집]


이 시기는 남로당 산하 30여 개의 단체들이 준동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남로당 산하 단체 중에 규모가 큰 민애청​[民愛靑]이라는 단체가 있었다.


민애청 조직은 군 경험을 가진 사람을 포섭의 일순위 대상으로 했었다. 

 * 공비들의 간부들 중에 일본군 출신이 아주 많다. 14연대 반란군의 주모자들 홍순석,지창수,이영회,송관일과 왜가리라 불린 호남 지방의 악질 공비 박춘성, 그리고 탱크 병단장 황학소등이 모두 일본군 출신이다.

산청군의 민애청 간부로서 강경위의 친구이기도 한 포섭자가 강경위가 버마 전선에서 풍부한 전투 경력을 쌓은 것을 알고 접근해와서 입회 서류를 내밀고 도장을 받아갔다. 미리 술도 사고 밥도 사서 그의 환심을 샀을 것이다. 

강경위는 사상이니 투쟁이니 하는 복잡하고 비현실적인 것을 선천적으로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저 민애청을 동호회나 친목회 수준으로 가볍게 생각했었고 그 뒤에 이들 모임에도 두 어 번 나갔지만 참석자들이 떠드는 낯설고 난해한 소리들에 혐오감을 느끼고 더 이상의 참석을 하지 않고 연락을 끊어버렸다​.

남로당이 남한 정부에 의해서 붕괴되어가면서 그 산하 단체에도 수사의 물결이 몰려왔다. 그 수사는 남로당의 지방 조직까지도 접근 해왔다. 강삼수 경위는 그때서야 입회 도장 찍어준 단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금서 지서에 찾아 가서 '자수'를 했다. 

산청 경찰서의 군사 분야 책임자는 일본 해군 육전대[해병대]출신 백남현씨였다. 군 경력자를 목마르게 찾던 것을 남로당뿐만 아니라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백남​현씨는 강삼수씨의 능력을 한 눈에 알아보고 심문이나 수사는 그냥 접어두고 그에게 경찰에 들어오도록 설득하였다.[1회에서 소개] 

​마침 직업을 찾던 강삼수씨는 백남현씨의 권유를 받아 들여 경찰에 입문하게 되었다. 이때가 여순 14연대 반란 전이었던 1948년 4월 이었다.

혼란한 해방정국에서 아무리 직업이 경찰이라도 이 정도의 좌익 접촉 배경이라면 ​크게 문제가 될 수가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해의 발단 

나는 부인 이종이 여사가 한을 품고 떠난 이 과장된 명예 훼손급 해프닝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보았다.​ 산청 경찰서에서 '지리산의 포성'을 출판할 때 강삼수 경위의 지서장 시절 부하였던 한 퇴직 경찰이 산청읍에 거주하고 있었다. 글재주도 있고 글씨체도 좋아 산청 경찰서는 그에게 강삼수 경위에 대한 글을 쓰도록 의뢰했는데 그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이었다. ​

이 집필 전후에도 유족들을 자주 만났던 듯 유족들도 그를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유족들은 그가 뒤에서 이렇게 큰 사고를 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여러모로 보아 그 분이 악의적인 목적으로 이런 과장된 표현을 한 것 같지는 않다.​ 전공이 높은 분은 항상 시샘과 적대감이 주변에 맴돌기 마련이다. 강경위가 한창 그 위명을 떨칠 때는 사회에 치열한 반공의식이 넘쳐 흐르던 때였다. ​이 사회적 분위기를 업고 뒤에서 그를 '빨갱이 운운"으로 험담하는 인간들도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말을 자주 들었던 그는 강경위의 정확한 사상적 아이덴티티를 확실하게 해두기 위해서 이런 다소 과장된 표현을 했던 듯하다.​ 


‘지리산의 포성’이 만든 또 다른 실수

​산청 경찰서가 발간했던 '지리산의 포성'은 귀중한 자료도 전해주고 있지만 이런 돌출 문제의 야기는 물론 다른 역사적 사건도 잘못 기록하여 후에 남겼다. 

 * 앞에서 소개했던 강경위가 추적했었던 강우형 안원도 2인조 공비가 1964년 5월에 죽었다고 써있어 이들이 1963년 11월에 소탕된 정순덕보다 더 오래 활동한 마지막 공비로 기록한 점이다.​ 현재 인터넷의 여러 곳에서 이 잘못된 오류 기록을 인용된 글들이 발견된다. 중요한 경찰 전사의 한 출판물도 오인 인용을 했었다.

그러나 여러 자료나 증언을 통해서 확인한 바 2인조는 정순덕이 체포된 1963년 5월에 자살한 것이 확실하다. 정순덕이 최후의 공비임은 움직일 수 없는 진실이다.​


62회 전투 적병 322명 사살의 전공 확인

​이 부분은 이유가 있어 자세히 설명하겠다. 

 * 보훈처 선정 뒤에 벌써 내 주변에 이 믿기 어려운 전공에 의문에 가진 인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국방부 ​블로그에 이 잊혀진 영웅을 소개할 때 좀 과하다고 생각 할 수 있는 제목을 사용했었다. 바로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삼수 경위'​라는 타이틀이다.

[한국전 최고의 명파이터 강삼수 경위]


3년간의 한국 전쟁과 8년간의 월남전에서 강삼수 경위보다 더 용감했었고 더 큰 전공을 세운 영웅들은 있었을 수가 있다.


그러나 강경위의 경우를 한 번 보자. 300여명의 적을 섬멸한 그의 지휘 병력은 무기라고는 칼빈같은 개인화기와 수류탄밖에 없었던 단 10여명의 대원들 뿐이었다.

그리고 자기 지휘하의, 60번이 넘은 전투에서 단 한 명의 부하도 잃지 않은 것은 기적 같은 일은 있기가 힘든 일이다.  산청서 사찰계장 직접 지휘 때 잃은 권영도 순경은 예외

그뿐인가, 그는 총탄과 수류탄이 난비하는 위험한 60여 회의 전투 현장에서 항상 앞장 서서 직접 전투를 지휘했었다.

한국전 최다 전투 경험자인 이대용 장군은 전투에서 지켜본 한 사실을 말해준다. 소대장급 간부가 여덟 번 정도 전투에 참가하면 부상을 입고 또 열다섯 번 정도의 전투를 겪으면 거의 전사하더라는 것이었다. 물론 공비 토벌의 전투 환경이 다르다 해도 강삼수 경위가 이런 다수의 전투들에서 자신은 물론 부하들까지도 전사자를 내지 않았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


​이 사실에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발견된다. 오늘날 전쟁 영웅들은 대부분 부대 지휘관으로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대부분 적의 총탄을 뒤집어쓰고 돌격하는 부하들보다 죽음의 가능성이 적은 후방에서 얻은 전공들이었다. 요즈음 매스컴에 가끔 전쟁 영웅으로 얼굴을 보이는 경찰 유공자들도 그 높은 직위로서 후방에 있었고 총격전에 직접 뛰어든 경우는 아주 드물었었다.

이것이 잘못되었고 이 사실 때문에 쟁취한 승리와 전공의 가치가 폄하되어야 한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전투의 승리는 지휘관의 능력이 좌우하며 또 지휘의 기능을 극대화하기 때문에 지휘관의 안전은 가능한 한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부대원과 같이 화선에서 총격전을 치러가며 승리의 견인차 노릇한 전공도 또한 크게 사주어야 한다.


모든 전투에서 앞장섰던 강삼수 경위

전쟁사를 보면 부하에게 돌격을 명해놓고 지휘관이라는 명분으로 뒤에 숨어서 전공만을 챙기는 비​겁자들이 자주 보인다.

나는 부하 강성갑씨에게 혹시 강​ 경위가 매복 병력을 배치해놓고 자기는 안전한 곳에서 잠을 자거나 따뜻한 마을로 내려가 민가에서 쉬는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다.

강성갑씨는 펄쩍 뛴다. 그래 가지고 매복이 성공하겠느냐는 말이었다. 강성갑씨는 매복은 ​위험한 적성 지역에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느 부락으로 지휘관 혼자 내려가서 편히 잠을 잘 수가 있느냐는 반문한다. 강성갑씨는 강경위가 부하들을 매복을 시켜놓고 다른 업무로 매복 현장을 떠난 사실은 딱 한 번 있었지만 몇 번을 생각해보아도 강경위가 부하들만 매복에 배치하고 자기는 편하고 안전한 곳에서 휴식을 취한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매복은 엄격한 전장 군기와 인내가 필요한 전투다. 영하 20도에 가까운 겨울에 땅에 엎드려 온 밤을 세우는 강인함이 필요한데 엄격한 지휘관이 지휘하지 않으면 이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좀더 편안한 자세인 앉거나 누워있는 자세는 공비들에게 발각되거나 공비들을 놓칠 가능성이 컸었다. 강경위는 이를 절감하고 부하들의 매복 군기를 강하게 요구하며 통제했었다. 이것은 그가 직접 전투를 지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산청 경찰이 조사 확인한 그의 전공

강경위가 겪은 62회의 전투, 적병 322명 사살, 61명 생포의 대기록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도 있을만하다.나 역시 때로는 유격대같은 소수의 부대로서 정말 이런 전과를 거두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머리를 들 때가 있었다.


전쟁사를 쓰다 보니 여러 가지의 현상이 발견된다.부대나 개인들의 영웅적인 전과에는 대강 거품이 끼기가 쉽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백여명 사살했으면 200여 명을 사살했다고 뻥을 튀기는 사실쯤이야 애교로 봐줄 수가  ​있다. 완전 허위 사실이 진실로 버젓이 통용되는 일도 있다.

 

나는 강경위의 믿기 힘든 62회 전투의 대기록이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게 스스로 말했을 것으로 짐작했었다. ​대개 자신이 몇 회의 전투에 참가했다고 하면 그것은 전투가 아니라 교전이다. 즉 적과 총탄을 주고 받는 물리적 전투를 말한다. 한 전투에서 시간을 가지며 공격과 방어를 하다 보면 여러 번의 교전이 있을 수가 있다. 나는 조심을 하기 위해서 강경위의 대기록을 교전일 것이라고 짐작하고 그를 소개하는 글에 이 전투의 대기록을 교전 기록으로 썼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오산이었다. 그가 세운 62회 전투의 대기록과 적병 322명 사살, 포로 61명의 전공은 그가 뻥튀기를 섞었을 가능성이 있을 수 있는 스스로의 자랑이 아니라 산청 경찰서가 그의 사후 표창장과 경남 도경[현재 경남 경찰청]의 전공 기록부를 대조하여 분석해서 종합한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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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경남 경찰청에 보관하고 있는 공적 기록부가 유공자들을 다 종합한 서류 묶음으로 되어 있는데 너무 많은 강경위의 전공 기록부만은 별도의 독립 책자로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소개했었다.


[경남 경찰청의 강삼수 공적[전공] 기록부]


​내가 유족들로부터 건네 받은 서류 뭉치에서 강경위의 전공 기록을 전투 별로 기록한 낡은 서류를 하나 있었다. 나는 강경위 생전에 강경위나 또는 그의 부탁을 받은 동료가 특별한 목적으로 작성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별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그러나 얼마 전 되돌아 살펴 보니 그 서류 첫 페이지에 이미 사망한 강경위의 재산 정도, 가족들의 이름과 나이 직업까지 상세하게 써있고 현재의 가족들의 경제적 상태가 어렵다는 사실까지 써있었다. 당사자가 스스로 쓸만한 내용이 절대 아니었다.​


이상하다 싶어 서류를 잘 살펴보니 하단에 아주 작은 글씨로 조달청 공식 서류 양식으로서 1972년에 결정 되었다는 사실이 기입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서류는 관청에서 작성되었다는 것을 말하며 그 관청은 산청 경찰서 외에는 없다고 판단되었다.

이 서류가 언제 작성되었을까 보았지만 아무 표시가 없다. 나는 이 서류의 첫 장에 있는 가족들의 나이가 있은 것을 보고 막내 강종상씨의 현재 나이와 비교해서 이 서류가 강 경위 사후 한참 뒤인 1986년에 작성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전공 내용을 날짜와 전투 별로 정리해놓은 기록부]


더욱 흥미를 가진 나는 이 서류가 어떻게 흘러나왔나 알아 보았다. 가족은 이 서류를 90년대 중반쯤에 전해준 사람은 아버지의 삼장 지서 부하였던 김모씨로서 그는 퇴직 후 산청 경찰서 앞에서 행정서사를 했었다. 


그는 업무 때문에 경찰서를 출입하다가 이 오래된 강경위 관련 서류를 발견하고 그 일부를 복사해서 가족들에게 전해준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은 이 서류가 왜 작성되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서류는 강경위의 표창장이나 다른 포상 관계를 분석하고 정리해서 시간 별로 그 훈포상 대상의 전과를 꼼꼼하게 정리해놓았다.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총합계를 내어 놓았다. 여기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전투 적 322명 사살 포로 61명 생포라고 분명히 써있다.


​[산청 경찰서에서 직접 분석 집계한 그의 전공]


이 서류는 아직도 산청 경찰서에서 보관하고 있는 듯하다. 건너들은 이야기지만 보훈처에 제출한 산청경찰서의 신청서에 이곳의 정보가 들어있었다는 추측이 가는 내용이 있었다.


각 전투 때마다 경찰에서 확인하였던 전과들

그럼에도 그의 대단한 전과가 부풀려졌을 작은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경찰의 공식 기록이 이렇다지만 사찰 유격대 보고 단계에서 전과가 부풀려 있을 수가 있다고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전투 경찰의 전과 심사는 [초기를 제외하고] 국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엄격하게 집계되었다. 이는 전쟁 전후에 전투 경찰들의 과장된 전과 보고가 지나치게 횡행해서 전쟁 지휘에 큰 혼란을 주었던 아픈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경찰은 이에 사살 적군 시체의 귀를 짤라서 제출하도록 하였다. ​언제부터 이 제도가 실시되었는지는 불명이지만 강삼수 경위가 1950년 가을 사찰 유격대장으로 출동한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고 공비들의 귀를 잘라 돌아왔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했을 당시부터 이 제도는 이미 실시되고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이 제도도 죽은 민간인의 귀를 구해서 제출하는 엽기적 악덕 경찰관이 나타나자 상부는 더 엄격한 기준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바뀌었다. ​부하 강성갑씨는 자기가 사찰 유격대에 합류하고 조금 있어 경남 도경에서 전과 확인물로 귀만 제출하게 되어있는 제도를 악용하는 인간들이 있다고

하면서 적 전사체의 목을 잘라서 제출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었다.

강성갑씨는 인간이 할 짓을 아니라 혐오감이 들었지만 할 수없이 전과를 인정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지금의 사고로서 도저히 상상이 가지도 않는 비상식적인 짓이지만 그때 전쟁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방법이야 엽기적이었지만 전과 확인의 확실한 검증은 경찰 표창장에 기록된 모든 전공이 신뢰할만하다는 것을 보증해준다.​

[이 사진 다시 한 번 올린다.]


이 산청 경찰서의 강삼수 전공 기록부는 몰랐던 사실을 하나 더 알려준다. 즉 표창장이 1951년 3월부터 수여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군의 훈장제도가 전쟁이 고비를 넘어 북진할 때인 1950년 10월에야 제정되어 많은 장병들이 무공을 세우고도 아무 훈장을 받지 못한 사례가 많았었다. 경찰에서도 그런 유사한 상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표창장이 없던 이전의 시기 강삼수 경위의 전투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그가 경찰에 투신한 1948년10월 발생한 여순 14연대 반란 사건의 잔당 700여명이 입산하여 공비로 변신하여 발호하기 시작했다. 비록 반란군 주력은 지리산 북쪽 호남 쪽에서 섬멸되었지만 잔당들은 6.25 전쟁까지 지리산 전체에 퍼져 준동하였다.


강삼수경위는 1949년 5월부터 산청 경찰서 김동식 주임아래 공비 토벌에 참가했다고 한다. 이때는 사찰 유격대가 창설 전이었지만 산청경찰서 본서는 독립 전투 경찰대를 운영하였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발생하였고 산청 경찰서의 서원들은 낙동강 전선으로 철수하며 여러 번의 전투를 겪었었다.

​산청군은 수복 직후 후퇴하지 못한 북한 정규군은 물론 좌익들이 입산하여 변신한 공비들로 구성된 대규모 공비부대가 북적거렸다. 수복 직후 산청군에서 박격포와 직사포까지 동원한 정규전 수준의 전투가 여러 번 있었다. 


이 시기 사찰 유격대가 편성되었으며 강삼수 경위는 치열한 전투를 쉬지 않고  겪었다. 전쟁 직전 직후의 전공이 위의 경찰 합계 전공에서 누락된 것이니 강 경위의 전투와 전과는 1951년 3월부터 시행하기 시작한 표창장 기록을 분석해서 확인한 공식 전공보다 훨씬 상회한다고 하겠다.

즉 강삼수 경위는 남한의 체제 전복을 시도하는 붉은 세력들이 움트기 시작한 시기에 경찰에 투신하여 이들 세력이 섬멸될 때까지의 십여 년 세월을 총탄과 폭탄이 작렬하는 전투의 일선에서 위국헌신에 젊은 인생을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산청 경찰서 사찰유격대원 명단

​강삼수 경위의 가족들은 강경위가 보훈처에서 실시하는 이달의 6.25 전쟁영웅에 선정되자 아버지가 전공을 쌓아 선정된 것은 사찰 유격대원들의 공을 잊을 수가 없다고 하며 그들의 이름을 밝혀 명예를 같이하게 해달라고 정중히 부탁한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강성갑씨로부터 대원들의 명단을 얻어 밝히고자 하던 참이었다.​ 강삼수 경위에 관한 기록에 그 부하인 산청 경찰서 유격대원들의 이름이 자주 등장하는데 여기에 오류가 있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앞 회에서 말한 권영도 순경이 권영직으로 소개된 것이 대표적인 사례인데 유격대의 대원이 아닌 사람이 유격대원으로서 큰 활동을 했다는 주장도 발견된다. 군대와 마찬가지로 그의 명성에 끼어들어 명예를 도둑질 하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경찰에도 있었던 것이다.

나의 요청에 강성갑씨가 자신이 근무했을 때 같이 전투를 했던 중요 전우들 10여명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해내서 알려주었다 경찰 전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여기 기록해두고자 하니 후에 전해졌으면 한다. 


사찰 유격대원들의 이름을 아래에 소개한다.

대장 강삼수 [금서면 화계리 ]

경찰 김정곤 [금서면 화계리 ]

경찰 권영도 [금서면 쌍효리 ]

경찰 강성갑 [금서면 화계리 ]

경찰 강재우 [금서면 화계리 ]

대원 정상수 [금서면 쌍효리 ]

대원 김두갑 [금서면 화계리 ]

대원 정종문 [삼장면 성남리 ]

대원 하상운 [시천면 내대리 ]

대원 이용점 [금서면 신아리 ]

대원 한상기 [금서면 화산리]

대원 정도진-판진- [휴천면 목현리] 


사찰 유격대원들중에 경찰 채용시험에 합격해서 정식 경찰이 된 분들도 있지만 학력이나 기타 사정으로 그냥 의용 경찰로서 근무한 분들도 있다. 


이들중 증언을 해준 강성갑씨를 빼고 모두 고인이 되었으나 그들 모두 강삼수 대장과 같이 산청 경찰서 소속 사찰 유격대가 거둔 기적같은 전공의 주인공들이었다는 사실을 특기 해두고 싶다.


 



 본 글은 "국방부 동고동락 블로그" 작가의 글로써, 국방부의 공식입장과 관련이 없습니다.





Trackbacks 64 / Comments 6

  • 남태양 2015.11.17 16:52 신고

    연재된 글을 모두 읽고 많은 생각이 드네요.
    이런 글을 남겨 주심에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고인들과 남은 분께 진심어린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유가족들에게 한이 풀리는 기회가 되길 소망해 봅니다.

  • 노래 2015.11.17 17:47 신고

    이런 글을 작성해주시어 고맙습니다.
    개인의 명예회복은 물론이요, 경찰의 활동을 공식적으로 기록하고 남겨 후세들이 참조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게다가 매복-추격 등의 대유격전의 좋은 참고가 되기도 하겠지요.

  • 보리밥 2015.11.17 22:07 신고

    선생님의 글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
    경찰이 하지 못하는 것을 선생님이 해주시네요
    감사합니다.

  • 노래 2015.11.18 00:29 신고

    선생님의 좋은 글 잘 읽었읍니다.
    선생님의 글을 보면 가슴 한 구석에서 울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국가가 나라를 위해 봉사 한 사람에게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하는 데
    우리 대한민국은 그렇지 못하네요. 나라를 지키려는 경찰을 죽인 대학생 놈들은 민주투사가 되고
    나라를 지키려 했던 군경은 못난사람이 되는 나라
    ...........

  • 수목원 2015.11.19 03:39 신고

    항상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글은 감동과 눈물을 주시고 나이가 들었어도 나라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합니다
    늘 건강하세요.

  • 달뜨기 2018.06.27 00:40 신고

    님들이 오직 나라를 위해 헌신하고 피를힌 이 나라 영우너히 천년만년 자유민주대한민국이 빛날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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